책 이야기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보지도 않았을 게야

경차니 2011. 12. 17. 23:54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의 이야기>  설흔 지음  | 창비

 

조선후기 이옥과 김려라는 두 문인의 우정과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옥과 김려가 쓴 책을 조합해 픽션을 가미해 소설로 구성했다. 재밌다. 책도 두껍지 않고 크게 피곤하지 않다면 하룻밤에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조선시대 정조가 성균관 유생들의 문체와 글쓰기 습관까지 간섭하면서 그것이 자신과는 달랐던 이옥은 유배도 가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해도 자신의 글쓰기, 문체를 고집한다.

 

"성리학과 권위, 지엄한 분부와 모진 명령이 끼어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소설을 닮은 그 문체로 고생을 자초했으면서도 이옥은 끝내 그 문체를 버리지 않았다.... 문체?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글의 성취도였다."

 

왕의 지엄한 분부와 명령, 성리학과 문체의 권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사람사는 모습과 사물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 문체의 이름이 무엇이던 상관없다는 태도, 그래서 그로 인해 인생이 고달파지고,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쉽게쉽게 살아갈 수 있는데도 '글'에 대해서는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이옥.

 

"나는 늘 영민하게 처신해 왔다고 믿었다... 나 좋아 쓰는 글일 뿐이었다. 그 글로 인생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내게는 부양할 가족도 있었으므로. 이옥을 동정하기는 했지만 그가 간 인생길을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다.... 임금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집요해진 느낌마저 풍겼다. 그런 그가 틀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가 아니었다. 태풍이 몰아치는 날에는 집 안에 틀어박혀야 하는 법이다. 나무가 뽑히고 지붕이 날아가는 그 길을 굳이 걸어갈 이유는 없었다. 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람 걷힌 맑은 날 다시 걸어가면 될 것이다."

 

하지만 김려의 생각은 달랐다. 이옥의 문체와 글쓰기가 마음에 들고 자신도 그렇게 글을 써 왔지만 그걸로 인해 일상에 피해를 보기는 싫었다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법, 이것이 김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김려도 결국 소나기를 피하지 못하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힘든 유배생활을 끝내고 어찌어찌 다시 지방관현의 현감이 되어 별 탈없이 살아가던 그에게 이옥의 아들 우태가 찾아온다. 그를 통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옥이 다시 더오르고 그와 함께 글을 쓰고 생활했던 날들을 이옥과 자신의 글들을 반추해 보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짙은 안개에 고깃배가 여러 날 들어오지 못하던 때 쓴 글이었다. 내 딴에는 고기 장사의 심정을 제법 잘 간파해 쓴 글이라고 자부했지만 지금 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마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저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같은 처지의 사람으로서가 아닌 현감의 시선만이 남아 있었다."

 

"벗을 따라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으면서도 막상 벗이 그 글로 고초를 당할 때는 한 발 물러서기만 하는. 불똥이 내게 튀자 그 불꽃을 끄기에만 급급했고 결국 그 불꽃에 내가 가진 것을 홀랑 태우고서는 눈물만 질질 짜낸. 가슴에 차고 넘치는 것들을 주체할 수 없어 글로 옮겨 쓰고서도 그 글들이 세상에 나가 제멋대로 활개치며 돌아다닐까 봐 책작 깊은 곳에 꼭꼭 싸서 숨겨 두기만 하는. 벗의 아들이 또다시 글로 고초를 당할 때도 자신의 속내는 감춰 둔 채 그저 잘못을 인정하라고 소리차며 강요하기만 하는 그 정도의 사람, 그게 바로 나라는 사람의 정체였다."

 

이옥이 쓴 '시기'라는 글은 장날 풍경을 아주 상세히 맛깔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자, 두 마리 소를 끌고 오는 자, 청어를 묶어서 오는 자, 청어를 엮어서 늘어뜨려 가져오는 자, 북어를 안고 오는 자, 북어를 안고 대구나 혹 문어를 가지고 오는 자...."

 

하지만 이 글에 이옥의 아들 우태는

 

"그 글이라는게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건 현실에서 한 발 물러서서 관찰하는, 관찰자의 시선에 다름 아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글을 읊어 준다.

 

"거칠게 찧은 보리밥 반은 까끄라기

싱거운 장 억센 나물 맛있을 리 없건만

그래도 평민에겐 고량진미요

이보다 가난한 이는 모두 지게미 신세로다

심복더위 흙이며 바위까지 태워

들의 논물 펄펄 끓는구나

잠방이 걱도 맨종아리로 들어가

종일 김매노라니 고생이 한이 없다

물고기, 자라도 익어 죽을 판인데

이허 그대 피와 살 상하지 않으랴

하늘 뒤덮은 불 우산 그 누가 면하랴만

농사꾼 향해서는 더욱 가까운 듯하네

괭이 거두고 때때로 하늘 우러러 비노니

가을 곡식 아무쪼록 거둘 수 있기를

꼭두새벽 문을 나서 별을 이고 돌아오니

여름날 길다 하나 쉴 틈이 전혀 없네

조정의 높은 분들 여름날 농부 고생 생각하사

세금 감면하시어 편히 살게 해 줍소서"

 

담담하게 농사꾼의 수고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 이옥이 쓴 '시기'의 묘사와는 다른 농사꾼의 고통이 절절하게 다가오고 그 심정을 잘 그려주고 있다.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라, 바로 당사자의 입장, 농사꾼의 시선에서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비판하고 말을 보태고 충고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상황에 직접 뛰어들고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를 그저 머릿속에서만 그리고 있진 않은가?

저기 멀찌감치 한 발 뒤에서 팔짱기고 이래라저래라만 하고 있진 않은가?

 

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내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아니 내가 진정 무엇을 바꾸고자 하는지는 알고 있다면 관찰자의 시선이 아니라 당사자의 입장과 시선이 되어 함게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 - 그것이 우리의 삶과 역사를 한발 더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어디를 가든 멋지지 않은 것이 없고, 어디를 함께하여도 멋지지 않은 것이 없다. 멋진 것이 이렇게도 많아라!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 보지도 않았을게야"

 

멋진 세상을 만들기 위해! 멋진 삶을 살기 위해! 멋진 벗들과 이웃을 위해! 멋지게 살아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