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판타스틱한 개미지옥

경차니 2011. 10. 16. 10:17

 

'판타스틱'과 '개미지옥'

 

 

명주잠자리의 유충인 개미귀신이 모래밭에 절구모양의 개미지옥을 만들고 그 밑 모래속에 숨어있다가

미끄러져서 떨어지는 개미들을 소화액을 넣어 녹여서 체액을 빨아먹는다. 그 함정이 개미지옥.

 

판타스틱은 말 그대로 기막히게 좋거나 환상적인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백화점이라는 판타스틱에 빠져 개미지옥에 빠져 서서히 체액을 빨아먹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그 주변 인물들, 손님들을 다루는 소설이다.

 

딱 하룻밤에 읽어버렸다. 225페이지라는 짧은 분량이고 가벼우면서도 뼈가 있는 문장들이 흡입력을 만들어 냈다.

 

10일간의 판타스틱한 세일기간 중 물건을 많이 팔아야 하는 다양한 이유로 백화점에서 일하게 되는 직원들과

진상 손님들, 백화점 주변에서 상품권을 파는 사람들 등을 중심으로 백화점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겪는 고충과 사랑, 욕망, 좌절, 상처를 그리고 있다.

 

"청구금액을 확인할 때면 성적표를 받아서 점수와 석차를 확인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카드 명세서를

뜯어보고 "잊고 있었던 자질구레한 결제 내역 몇건을 새로 알게 되고 몇 건은 곰곰이 생각한 후에야 겨우 기억"하며

한숨을 내쉰다.

 

비정규직, 여성, 저임금 노동자로 표현되는 백화점 노동자들은 그만 알면서도 착각에 빠지고 만다.

 

"사실 백화점이라는데가 좀 그렇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 주인공이다. 직원들은 그저 물건을 파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하루 종일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비싼 물건을 만지고 있다 보니 자신이 그 물건의 주인이라도 되는 줄 안다."

 

이 시대 88만원세대로 등록금과 생활비 마련을 위해 알바로 시작했지만 백화점의 메카니즘에 스스로 얽매이고 묶여버리고 만다.

 

"매일 물건을 판다. 빈 공간은 다시 새로운 물건으로 채워진다. 언제까지나 그렇다. 진열할 물건은 얼마든지 있다. 물건을 팔고

월급을 받고 그 돈으로 다시 이 안에서 물건을 산다. 갖고 싶은 물건은 계속 생기고 탐욕은 끝이 없다. 사고 나도 금세 좀비처럼

허기지다"

 

백화점의 멋진 옷을 입기 위해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다가 결국 쓰러지고, 백화점의 값비싼 화장품을 사기위해 자신의 몸을 팔아야

하고, 끝내는 남이 먼저 차지한 물건을 빼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백화점으로 표현되는 자본주의의 삶과 그 속에서 20~30대의 젊은이들이 끝없는 욕망과 탐욕을 쫓는, 하지만 언제나 카드는 연체되고

생존하기에도 숨이 턱까지 차는 이 땅의 비정규직 저임금 여성 노동자의 삶을 우회적으로 잘 그리고 있다.

 

결코 공평하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은 세상에서 언제나 경쟁하고 남을 밟고 일어서야만 하는 자본주의.

한겨울 칼바람도, 한여름 뙤약볕도, 쏟아지는 비속에서도 언제나 따뜻한 봄날 오후같은 백화점 안 -

1% 가진 자들만을 위한 그 공간에서 99%의 못가진 자들이 굽신거려야 하고 그들의 논리에 젖어들고 결국 그 욕망과 탐욕을

쫓기위해 개미지옥으로 빠지고 마는 사회.

 

바로 지금의 자본주의사회, 우리의 사회는 아닐까? 

 

"백화점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밖에서 보내는 시간과 좀 다르게 흘러간다. 풍경이 없고 계절도 없다. 화려한 조명과 인테리어,

진열되는 상품만 모습을 바꾼다. 시간도 세일이냐 세일이 아니냐로만 나뉜다.... 기상이변, 내수시장 위축, 자살, 청년실업,

이런 것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전부 다른 세상의 얘기 같다. 그냥 여기에는 물건이라는 주인공이 있고 그것을 파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